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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빈센트


 파리 출장 기간엔 눈이 많이 내렸다. 자주 길이 얼어붙었고 언덕 근처에 숙소가 있었던지라 올라가는 길은 벅찼고 내려오는 길은 늘 긴장하며 발을 딛어야 했다. 언어소통의 불편함과 고향에 비해 어둑어둑한 낯선 거리가 주는 위화감에 지쳐갈 때였다. 귀국을 몇 주 앞둔 어느 주말 동료들은 귀국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려 했고 나는 인터넷 서치를 하다가 발견한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이 있다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가고자 했다. 초행길을 혼자 가려는 생각에 조금 두려움이 느껴질 때 현지 거주중인 법인 과장님과 동료 M 이 동행을 자처했다. 조금쯤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도를 챙겨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북역을 거쳤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가이드북에 표기된 기차 같은 것을 타고서 중간 환승지 쯤에 잠깐 내려 요기를 하고 다시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며칠 간 눈이 내리지 않다가 그 날 따라 갑자기 대설이 내렸고 목적지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했을 즈음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눈발이 퍼부었다. 겨우 겨우 발걸음을 떼며 동네식당에 잠깐 들러 정확한 방향을 물어본 후 다시 나아가는 중에 한 눈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같은 방향으로 걷던 중에 말을 걸어 왔다. 이 동네에서 수년째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고 했다. 고흐를 보러 온 곳에서 한국인 화가를 만난 건 꽤나 신선했고 괜찮다면 집에 잠깐 들렸다갈 것을 권유 받았지만 돌아갈 길을 고려하여 정중히 고사하고 사내와 작별을 고했다. 깡마른 몸에 두꺼운 안경을 끼고 어느 정도 지저분한 머리를 한 중년의 예술가. 지금은 그 인상이 가물가물하지만 사내의 건강을 빈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보았던 동네 교회는 일부 공사 중이었다. 교회를 등지고 오르막을 올라가다 보니 황량한 벌판이 나왔다. 필경 햇빛 따뜻한 계절엔 까마귀가 날았던 밀밭이었으리라. 마음 속 캔버스에 하늘과 밭과 그 때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품으며 고독한 풍경을 음미했다. 아마 오른쪽으로 공동 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양식 공동 묘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고국의 그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눈으로 더듬어가며 찾던 중에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도르의 쌍둥이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날 우리는 가져간 것이 없었지만 고흐의 무덤을 방문한 이들은 귤이나 편지 같은 것들을 무덤에 두고 오곤 하는 것 같았다. 고흐의 빅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점의 그림을 보며 자란지라 조촐한 마음만 두고 돌아서기로 했다. 과연 무덤은 무덤이었다. 무언갈 기대한건 아니지만 무덤 속에서 고흐가 걸어나오지도 않았고 그를 추모하는 깊은 비애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거기엔 단지 산자와 죽은자의 고독한 만남만이 있을 뿐. 날이 점점 어둑해져왔기에 발길을 서둘러야했다. 길이 얼어붙어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고 온 몸은 꽁꽁 얼어갔다. 동행한 이들에게 미안함이 느껴질 때 쯤, 올 때엔 보이지 않았던 또다른 동네 식당이 눈에 띄어 몸을 녹일 겸 무작정 들어갔다. 손님은 거의 없었고 무뚝뚝한 주인이 우릴 맞이했다. 다행히 상냥해보이는 어린 서버에게 뜨거운 음료를 부탁하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동료들과 그날의 소회를 조금 나누었다. 몸이 녹을 때 쯤 복귀 차편의 시간이 걱정되어 엉덩이를 떼고 부지런히 걸었다. 복귀편은 대설 때문인지 꽤 지연이 되었고 겨우 기차인지 지하철인지에 올라탔을 때 쯤엔 노곤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로부터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아예 기억조차 나질 않고 지금도 몇 년이나 지난 그 때를 떠올릴 때면 당시의 고생에 절로 몸이 뻐근해지는 느낌이다. 법인 과장님은 그 후로 연락을 해 본 적이 없고 동료 M 은 이후 또다른 동료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힘든 길을 동행하며 중간중간 찍었던 스냅 사진들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곳에서 풍화되어 스러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생 W 가 소개해준 K 는 첫만남에서 테슬라와 고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전공이 공학 쪽이라 그런지 테슬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듯 했는데 K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서도 니꼴라를 좋아한다거나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지라 꽤나 신선했다. 아니, 그 전에 고백하자면, 그 자리에선 K 가 말한 테슬라를 어렴풋이나마 자동차 브랜드로 오해했었는데, 같은 공대라도 나는 정보컴퓨터공학 쪽이어서 아예 니꼴라 테슬라를 알지 못했고 딱히 그 쪽에의 교양에 가까운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해한 상태에서 스리슬쩍 아 그렇구나, 하는 태도로 넘기고 난 후, 나중에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테슬라에 대해서 찾아보곤 그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는 사정이 있다. 고흐에 대해서는 그의 그림들을 다분히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내가 고흐의 그림에 대해선 많이 보고 알진 못하는지라 짧은 공감만을 나누었다. 물론 그의 무덤을 방문했던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커피를 마셨고 몇 갠가의 얘기를 나누었으며 헤어질 때엔 차비가 없어서 K 에게 이천원을 빌려주었다. 웃음이 절로 피식 나왔고 그녀는 후일 갚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느낌이 나쁘지 않아 또 한번의 만남을 청했고 고흐를 좋아한단 K 의 말을 떠올려서 서울 근교의 미술 전시회를 예약하고서 약속을 잡았다. 사실 고흐의 전시회를 예약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전시가 없어서 수려한 색채의 풍경화로 잘 알려진 끌로드 모네의 전시회를 예약하였다. 각자 살던 지역이 멀어서 한참 차를 몰아 K 의 동네에 닿았고 그녀를 태워서 다시 모네의 전시회 장소로 향했다. 단층의 넓은 공간에 내부를 모네의 그림과 디지털 아트로 풍성하게 채운 전시회였고 K 와 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꽃이며 정원 들을 그려낸 작품들을 감상했다. 만남도 만남이지만 오랜만의 전시회 나들이는 꽤나 기분을 환기 시켜주었다. 전시회를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을 때 쯤엔 해가 중천이어서 무척 더웠다. 조금 이동하여 유명하다는 오래된 냉면집을 찾아 냉면과 만두를 먹었고 뒷편의 공원에서 준비해간 돗자리를 깔고 누워 그늘을 즐겼다. 더울까 싶어 준비해간 아이스박스의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꺼내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고 음악을 들었다. 꽤나 여유로운 망중한이었고 한껏 늘어질 수 있었다. K 와는 이후로도 서너번을 더 만나며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K 에 대한 감정을 어느 정도 구체화해가는 즈음 K 는 원래 준비중이었던 일정이 있어서 안나푸르나로 떠났고 그 후 몇 번의 연락을 더 이어가다가 은근슬쩍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그렇다고 해두기로 하자. 꽤나 지난 일이지만 당시 그녀가 좋아하는 고흐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러빙 빈센트라는 고흐의 영화-고흐의 실제 작품들을 애니메이션처럼 꾸려서 만든-를 DVD 로 사서 언젠간 보려고 서재에 꽂아 두었던 것이 기억나 오랜만에 꺼내어 감상했다. DVD 케이스부터가 유화 캔버스처럼 거칠거칠한 질감이었고 영화 자체가 장면과 장면을 여러 장의 실제 유화로 이어 붙여서-아마도 엄청난 양의 작업이었을 것이다-거친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흐의 전 생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고흐의 말년을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좇아가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자연스레 K 가 떠올랐고 그 이전의 오래된 기억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와 그 때의 동료들이 떠올라 조금쯤은 푸근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