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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4_유희

겨울휴가

 설 연휴가 끝나고, 3일 간의 겨울 휴가 기간.

 딱히 계획은 없었으나, 느지막히 제주도를 알아보던 중에 극심한 한파와 기상 문제로 제주도 비행편이 결항중이라는 뉴스를 보고나선, 제주도 여행을 접고 서울 이곳저곳을 가보기로 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도심 속 작은 산인 응봉산과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와 위스키를 맛볼 요량으로 남산 스윙을 점찍었다. 두 곳은 서로 도보 한 시간 정도의 거리를 격하고 있어서, 어느 한 곳에서 시간을 보낸 뒤 다음 곳으로 걸어서 이동하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출발 당일 오전부터 영하 20~10 도를 찍는 날씨 탓에 움츠러들뻔 했으나 전날 어머니와의 전화를 떠올리며 분발하여 집을 나서보기로 한다.

 수원에서 서울까지는 광역버스로 손쉽게 이동했고, 강남에서 남산까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야했다. vertigo개 정류장에서 남산 스윙까지 헉헉대며 언덕길을 올라 오랜만의 스윙에 입장했다. 위스키에 있는 힘껏 빠져들었던 지난 한 해 동안 이 곳 스윙은 한 세 번 정도 드나들었던 것 같다. 위스키 카페에서 구하고 싶던 위스키를 문의하다가 스윙 사장님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처음 방문했었고 그 후로도 맛있는 위스키를 먹기 위해 혹은 구하기 위해 두어번 더 들렀었다. 위스키 카페에 회원과 운영진간 분쟁이 있었던 사건 이후로 카페 활동에 흥미를 잃고선 위스키도 조금 시들해졌고 여기저기 바 투어 혹은 마트 투어를 다니는 일도 점점 소극적이 되었고 마침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서 위스키를 즐기는데에 피로감이 느껴져서 당분간 위스키와 관련된 곳은 발길을 끊었었다. 그러다가 휴가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여유롭게 커피도 마시고 위스키도 조금 즐겨볼 요량으로 스윙을 찾은 것이다. 일단 시작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부탁드렸는데,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고소한 라떼를 테이크아웃해가는 손님들이 꽤 많아서 필터 커피를 주문한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직원 한 분이 서빙을 하고 계셨다.)

 

 에티오피아(원산지) G1(등급) 아리차(생산지역/농장) 에이미(브랜드?) 네추럴(가공방법), 이라는 필터 커피를 주문했고 단정한 커피잔에 직원분이 직접 커피를 서빙해주셨다. 하필이면 심한 코감기 목감기에 시달리고 있어서 커피의 다정하고 섬세한 향을 백퍼센트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코 끝에 걸리는 향긋함과 가벼운 바디감 목넘김 등을 기분좋게 즐길 순 있었다. 요즘 집에서 카페리브레의 원두를 가지고 프렌치프레소를 내려 마시고 있는데 바다소금의 크기로 갈아내어 우려내고 있음에도 너무 묵직한 질감을 지녀서 먹기가 곤혹스러웠는데, 역시 스윙의 커피는 후루룩 후루룩 먹어치울 정도로 딱 알맞게 우러나있어서 감탄하며 먹었다.

 커피를 두 잔 정도 먹은 후, 컴파스박스 벨리코어(vellichor)와 스프링뱅크 15Y 를 각각 하프 온스로 주문했다. 주문한 후에 위스키 가격 가이드를 뒤적여봤는데 벨리코어는 1 글래스에 110,000(!) 이어서 깜놀했다. 보틀을 받아서 뒷 라벨을 보니 약 3천 병 남짓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되어있어서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갔고, 다행히 하프 온스로 주문한 것에 위안을 느꼈다. 사실 작년에 스윙에서 컴파스박스의 페노메놀로지(7? 8? 천병 남짓의 리미티드 발매였던 듯)와 익스퍼리멘탈 그레인을 맛보고 감탄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컴파스박스의 한정판 중 하나를 먹어보고 싶었던 차라 가격에 크게 개념치는 않았다. 우선 스프링뱅크 15Y 를 먼저 시간을 들여 맛본 후, 다음 컴파스박스 벨리코어를 맛보기로 했다. 눈으로 쫓고 코를 박고 킁킁대며(비록 감기였지만) 위스키에 온전히 다이브 해보려고 했다.

 

스프링뱅크 15Y

향 : 라벤더, 피트, 팬에 두른 버터
맛 : 달콤, 피트, 짠내, 약스파이시
끝 : 몰티, 짠내, 길게 이어지는 스파이시
잔향 : 사우나 수증기 같은 시원한 버터 잔향
인상 : 해풍에 실려온 보랏빛 꽃내음

 

 

컴파스박스 벨리코어

향 : 라벤더, 버터, 공장에 떠도는 플라스틱 관련 제품의 냄새
맛 : 달콤, 짠내
끝 : 짧게 이어지는 달콤함
잔향 : 버터 잔향
인상 : 과일 계열의 향들과 공장 제품의 향이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이어지다가, 적절할 때 쯤 툭 끊기면서 인위적이지 않은 지점까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컨디션 문제도 있고 해서, 더 이상의 분석은 무의미했고, 남은 위스키들을 조금씩 목으로 흘려넘기며 그 시간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남은 커피를 털어넣고, 다음 장소인 응봉산으로 이동을 하기로 한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약 한 시간의 거리를 길을 더듬어 가며 걸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언덕길들에 많은 아파트들이 있었고, 금남시장? 도 스쳐 지나가며 생전 처음 방문한 거리의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오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그래도 영하 10 도 정도의 날씨에 마스크 속이 축축해져갈 즈음, 응봉산 등산로에 도달했다. 아픈 몸을 억지로 끌고서 계단으로 된 짧은 등산로를 힘겹게 올랐다. 사람은 별로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봉산 팔각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팔각정 주위엔 포토 스팟들이 많았는데, 좌우로 길게 뻗은 한강과 성수대교 동호대교 등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야경으로 유명하다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인지라 야경을 포기하고 맑은 오후의 한강과 주변을 휴대폰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대었다. 팔각정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조금 사진 찍기에 방해가 되긴 하는데, 나뭇가지들을 피해서 사진을 줌인 하여 열심히 찍어보았다.

 

 도심 속에 이런 뷰를 가지고 있으면서 등산하기에도 그리 힘이 들지 않는 산이 있다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여태까지 서울을 방문하며 경험한 중 개인적으로 최고의 view 에 해당한다 할 수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 팔각정에도 한 번 올라보았다가 좀 더 추워지기 전에 귀가하기 위해 하산을 서둘렀다. 응봉역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경의중앙선을 타고서 왕십리에서 수인분당선을 타고 수원으로 귀가했다. 지하철 내에서 갑자기 허리가 무척 아팠다. 디스크가 튀어나오는 역 C 커브의 자세에서 왼쪽 허리 즈음에 순간적인 고통과 더불어 왼쪽 다리의 힘이 풀리는 현상이 발생했고, 오른쪽 다리와 팔로 겨우 중심을 잡은채로 억지로 버티며(사실 버틸수는 없었고 겨우 순간순간을 넘기며) 수원까지 힘겹게 지하철에 탄채로 이동했다. 집에 와서는 허리디스크를 초래한 내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무력감에 잠깐 우울했다가, 올해도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건강을 좀 더 챙겨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건강이 최고라는 말은 절대 지나침이 없는 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힘을 내보기로 한다.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