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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02_소고

근황

 몸 상태가 좋질 않아서 연차를 사용하고 회사를 하루 쉬었다. 감기약을 끊었더니 정신은 좀 더 명료해졌으나, 과연 염증이 심해져서 좀 더 기침 및 가래가 심해졌고 급기야 코가 꽉 막혀서 호흡하기도 어려워졌다. 다시 약을 복용하거나, 아니면 끊었던 운동을 꾸준히 하여 기본적인 스태미너 및 면역력 등의 상태를 끌어올려야 하겠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이 나면 하려고 맘 먹었던 다 읽은 도서 판매를 해보고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라X 중고서점이 수원역 바로 앞에 있어서(지하철 10번 출구) 집에서 자동차를 끌고나가면 금방이었기에, 일단 옷부터 주섬주섬 챙겨입고 그 다음 판매 처분할 책들을 골랐다. 중고도서판매는 처음인지라 일단은 내가 보기에 상태가 괜찮은 아이들로만 대충 골라보았는데,

모모 /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냉정과 열정 사이 Blu / 채식주의자 / 천사의 부름 / 이야기 한국사 / 밤의 거미원숭이

이야기 한국사는 사실 읽어보지도 못하고 판매를 하게 되어서 기분이 씁쓸하였으나, 최근 미니멀리즘 관련 주제의 도서를 읽고난 후 인지라, 오래간 손이 가지 않았던 물건들은 결국 나와 인연이 없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판매 리스트에 넣었다. 그 외에는 모두 한두번씩은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이어서 잠깐 그 내용들과 당시의 감흥들을 생각했다가 과감히 비닐봉투에 하나씩 넣었다. 하는 김에 입지않은채 오래 지났거나 혹은 더이상 입고싶은 마음이 들지않는 옷가지들도 대여섯개 골라내어 의류수거함에 처분해버렸다. 지금 이렇게 쓰지않는것,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을 골라내는 것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러한 물건들에 기우는 약간의 신경쓰임들조차 하나씩 처리하여 결국 좀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자하는 것이니, 수단을 목적처럼 당연히 여기지는 말 것이며,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잠깐 새었지만, 그렇게 책을 챙겨들고 중고서점 근처의 롯데백화점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평일 오후임에도 도로는 한산하지 않았고, 많은 차량들이 내가 모르는 수많은 목적지들을 향해 성실히 달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도로 위의 우리들은, 저도 모르게 잠시나마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사거리를 공유하고 같은 고가도로를 달리며, 잠시나마 무리를 이루었다가 모처의 모 분기점에서 곧 다시 고독한 짐승마냥 제 갈길로 나누어 갈라지는 것이리라. 떠나는 그들에게 무운을 빌어본다.

 주차후 책들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덜렁거리며 중고서점을 찾았다. 지도 보기를 게을리한 벌로 십여분간 헤매다가 괜히 옷을 좀 사고프기도 한 마음에 백화점 근처도 어슬렁거리고,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서점을 찾아나섰고 지하철역 10번 출구에서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카운터의 말쑥한 청년이, 알라X 회원가입 및 도서의 가격 책정 등에 대해 세세하게-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로 꼼꼼히-하나씩 설명해주는 것을 귀담아 들었다. 최상급 두 권에 나머지는 균일가 취급을 받았고, 한권은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젊었을 적 책을 완독한 후 느꼈던 나의 감상을 적어둔 부분이 있었는데, 청년이 무덤덤하게도 '낙서가 있어서 낮은 등급입니다' 라고 말해주어서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감상' 이 아니라 '낙서' 라고 말해주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가장 많은 가격 책정을 받은 것은 역시 트렌디한 [채식주의자] 였고, 가장 낮은 가격을 매긴 것은 역시 낙서가 있었던 [모모] 와 낙서는 없었지만 왠지 낮게 책정된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였는데, 아마도 현시점에서 서점내에 구비중인 도서량의 비율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일곱권을 처분하고서 현금 만원하고도 삼백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받은 돈을 소중히 움켜쥔 채 서점 내를 차분히 돌아보았고, 조심스럽게 셜록홈즈와 장 도미니끄 씨가 눈 깜박임 만으로 만들었다는 [잠수복과 나비] 를 구매하였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씨가 프린팅된 비닐봉투에 구매한 책을 담아들고 그렇게 귀가하였다.

 그런고로, 현재 읽고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 와, 직장인 e-learning 수업과정의 교재인 [자존감 수업], 그리고 오늘 구매한 중고도서 두권을 합하여, 새로이 독서 리스트가 짜여졌다. 당분간은 집중하여 읽어 볼 생각이다.

 

 내 집을 갖고 내 서재방을 정하고 책장을 비치한 이후로, 실제 읽는 양보다 엄청나게 많은 도서들을 구매하여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어떤 책에 관심이 있고, 이런 책을 읽는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이런 책들을 소중하게 여겨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기 위해 책장에 비치해둔다... 는 것은 결국 외부에 보이길 원하는 나의 모습인 것 같다. 실제론 보여줄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정말로 반복하여 읽는 책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실제론 서두만 몇 번 읽다가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다시 꽂아둔 책들이 많다는 것은, 굳이 이렇게 쌓아두고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사모았다간 결국 평생이 가도 읽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은 겉보기엔 잠깐 뿌듯할지 몰라도, 늘 마음 한구석에 burden 으로 남아서 신경을 쓰이게 할 것이고, 결국은 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려는 나를 방해하게 될 것이기에... 조금씩 처분하거나 빨리 읽어버린 후에 중고판매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이제 조금씩 실행에 옮기려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홀쭉하게 줄어든 책장엔, 현재 가장 관심있는 책 대여섯 권과, 곁에 두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고싶은 평생의 반려자 같은 책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썩 나쁘지 않은 전개이다.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