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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1_읽기

스푸트니크의 연인

 

 

 

 

1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도서대여점에서 우연히 이 책과 마주쳤었다.

주로 만화를 빌려 보다가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이유리의 [십대들;] 등을 보게 되면서 소설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가던 때로, 뭔가 괜찮은 책이 없을까 뒤적거리다가 이 책을 끄집어내게 된 것이다. 당시의 느낌은 뭐랄까, 삭막했다. 연한 갈색의 커버에 정체를 알 수 없는(아마 스푸트니크라는 위성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겠지) 금속으로 이루어진 물체, 그리고 검은 활자의 [스푸트니크의 연인]. 그 땐 스푸트니크가 뭔지 몰랐던 때라 상당히 기묘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본래의 자리에 책을 꽂아넣었다. 안타까운 이별이지만 그 때 당시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2

 그리고 시간은 꼼꼼히 흘러 어느덧 나는 군대를 제대했고 언제부턴가 하루키 문학의 팬이 되었다. 물론 언젠간 독후감을 쓰게 되겠지만 여러 편의 작품을 섭렵했었다. 시작은 역시 [노르웨이의 숲] 이었고 그 후 군대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 로 이어지는 '쥐 4부작' 과 수필집 [무라카미 라디오]. 제대 후 단편집 [밤의 거미 원숭이] 를 거쳐 시간의 어떤 모퉁이에서 줄곧 나를 기다린 듯한(혹은 내가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을 만났다. 뭔가 굉장히 길고 힘든 길을 돌아온 기분이다. 여담이지만 누군가의 홈페이지에서, 그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라고 밝힌 점도 이 책과의 만남에 보탬이 된 것 같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3

 나, 스미레, 뮤 3명이 등장한다. [나] 는 처음엔 단순한 내레이터인듯 가볍게 등장해서 나는 당연히 [스미레] 가 우리의 주인공인줄 알았다. 그러나 얘기가 점차 진행되면서 [나] 의 심리 묘사가 공공연히(?) 드러나고 마침내 '사실은 내가 주인공이었던거야'라고 말하듯 그 존재가 확실히 각인된다. 물론 이것은 독자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건 이것은 나의 독서일기이니깐. [나] 는 이를테면 [스미레] 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지만 확실한 자기 존재를 가진 [나] 이기도 한 것이다. [나] 는 [스미레] 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사랑한다. [스미레] 는 [나] 를 정신적으로는 '좋아'하지만 육체적인 면에서는 묘사가 없다. 그리고 [스미레] 는 [나] 가 [스미레] 에게 그렇듯, [뮤] 를 정신+육체적으로 사랑한다. 물론 [뮤] 도 [스미레] 를 사랑한다. 다만, 현재의 [뮤] 에게는 성욕이란 것이 없다. 십 수년전 그녀의 머리를 백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기묘했던 사건 이후로 그녀에게서 성욕이란 것은 사라져버린 것이다(어딘가로). 가는 화살표와 오는 화살표 간의 이질감. 여기서 스푸트니크의 슬픔은 생겨난다. 지구에서 쏘아 올려졌지만 지구 주위의 정확한 궤도만을 맴돌 뿐 결코 닿을 수 없는, 따뜻한 피부를 만질 수 없는 금속 덩어리의 슬픔. 그것은 [나] 의 슬픔이기도 하고 [스미레] 의 슬픔이며 [뮤] 의 슬픔이기도 하다. 슬픔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는 성욕의 배설구를 찾고 누군가는 이 쪽 건너의 '저 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한다.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충족되지 않는 필요충분조건에 자기 나름의 방편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인간은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혼자이면 고독하고, 누군가를 필요로 해도 고독하며 누군가와 함께일 때조차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진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기만 이다. 마치 영원히 뚫려버린 구멍처럼 우리에겐 텅 빈 공간이 존재하며 내 생각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숙명적인 아픔 혹은 슬픔. 혹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

 

4

 [스미레] 의 실종 후에 [나] 와 [뮤] 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나] 의 담당 클래스의 학생인 [홍당무] 의 절도사건에 불려간 [나] 는, 돌아오는 길에 [홍당무] 와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왠지 [홍당무] 로부터 용서 받았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스미레] 를 떠올린다. 여기서 [홍당무] 는 자기완결성을 가진 존재로 생각된다. 사고와 행위의 거침없음, 그리고 자기침잠. 서평을 보지 않아서 작가의 의도는 잘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서 '결국' [스미레] 는 '이 쪽'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녀가 갔다온 곳은 아무래도 '저 쪽' 세계일 것이며 거기서 그녀가 보고 온 것은 십 수년 전 [뮤] 가 잃어버린 섹슈얼한 [뮤] 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스미레] 는 돌아왔고 그녀는 [나] 에게 돌아왔다는 인사와 함께 [나] 에게 좀 더 발전된 관계-정신적, 육체적 사랑일꺼라 생각된다-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 는 초조해하지 않고 [스미레] 를 맞이한다. 끝의 이 재회 부분은 [노르웨이의 숲] 의 [와타나베] 와 [미도리] 간의 재회를 많이 닮아 있다. 지치고 상처입은 존재가 아픔을 딛고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수화기 너머 저 편의 존재와 해후하는 모습-우리는 인연의 끈으로 닿아 있다, 라는 느낌. 어쩌면 [스미레] 의 실종은 [노르웨이의 숲] 의 [와타나베] 가 [나오코] 의 죽음 후 거지처럼 돌아다닌 '여행' 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건 당연한 걸까.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