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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02_소고

대설, 침대, 호빵 그리고 만둣국

 

 북극 한파와 함께 대설이 찾아 왔다. 강한 눈발이 우면동을 삽시간에 뒤덮었고 퇴근 버스를 기다리며 그치지 않는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일반 차량에 비해 버스 전용 차선을 탈 터라서 그나마 퇴근 시간은 지켜졌지만,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차량들을 보니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원에 도착했다. 겨울 왕국이 여기구나 싶었다. 쏟아붙는 눈발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며 아장아장 아기걸음으로 귀갓길을 가노라니, 얼마전 공사가 끝난 아파트 단지 근처의 공원에선 많은 인파가 몰려와 오랜만의 대설을 즐기고 있었다. 눈은 어디에나 공평하게 내려앉았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얀 마스크와 깔맞춤한 하얀 눈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옷에 묻은 눈을 털고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추어 보니, 나 또한 하얀 눈모자를 푸짐하게 머리 위에 이고 있었다. 덕분에 흰머리가 어느 정도 감추어졌다. 빨갛게 익은 손을 부벼 가며 따뜻한 집으로 귀가를 마쳤다.

 

 

 

 지난 해 연말에 육중한 내 무게를 여태껏 버텨왔던 침대 프레임이 무너져 내렸다. 머리맡 프레임과 왼쪽 프레임을 고정하던 힌지의 나사가 빠져버렸던 것인데, 침대에 눕는 순간 한쪽으로 무너져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순히 나사 구멍이 헐거워져서 빠져버린 것이라 생각하고서 임시로 나사와 나사 구멍 사이의 헐거움을 줄여주기 위해 비닐을 나사에 감아서 박아두었었다. 그리고 침대 프레임을 아예 빼버릴지 혹은 나사를 새로 박아넣을지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이사 기념으로 사주신 소중한 침대라서 수리해서 쓰기로 마음 먹고, 전동 드릴을 주문해두었다. 기존 헐거워진 나사 구멍 옆에 목재용 비트로 구멍을 새로 낸 후 힌지 위치를 이동시켜야지 하고 계획을 세워두었었다. 연말 연초 배송 일정이 지연되면서 전동 드릴이 최근에서야 도착하였고, 무거운 매트리스와 나무 판을 겨우겨우 분리 시킨 후에 힌지와 나사를 다시 관찰하였다. 다시 확인해보니 실제로 나사 구멍이 헐거워진게 아니라, 나사와 나사 반대쪽에서 나사를 잡아주는 소켓? 같은 부품이 서로 분리되어 그 소켓 같은것이 뒤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사가 고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 구멍을 뚫을 필요는 없어 보여서, 소켓을 나사 구멍 반대편에 다시 끼워주고 전동 드릴로 나사를 꽉 조아주었다. 그럭저럭 튼튼하게 고정이 되었다. 이참에 전동 드릴도 새로 장만하게 되어 불만은 없다. 앞으로 침대를 아껴 써야 하리라.

 

 

 

 한파와 대설로 며칠간 많이 추웠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아파트 단지 내 편의점에 들러 아무 생각 없이 호빵을 한줄 샀다. 마침 집에 우유가 있었고-어쩌면 집에 있는 우유와 페어링을 하기 위해 호빵을 샀을 수도-얼른 호빵 두 알을 데워서 차가운 우유와 함께 씹고 마셨다. 따뜻한 호빵이 식도부터 차가운 마음까지 그 온기와 달콤함으로 위로해주었고 그 뒤를 이어 차가운 우유가 이완된 몸과 마음을 다시금 수축시켜 주며 깔끔하게 정돈하였다. 겨울이면 가끔 이렇게 호빵을 먹곤 한다. 가족이 있는 본가에서 어린 시절 맛보곤 하던 호빵을 지금 이렇게 나이먹고서도 그리워하며 찾는 걸 보니 호빵은 식품의 카테고리에 더하여 호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오브제로써도 기능하는 듯하다. 참 좋다.

 

 

 

 두 번째 대설이 내린 날엔 뜬금없이 얼큰한 만둣국이 그리웠다. 차가워진 몸이 강렬히 원하고 있는 듯하여, 퇴근길에 사골액과 손만두 한봉지를 샀고 따뜻하게 구운 햄이 먹고파서 햄도 한 줄 샀다. 얼른 집에서 사골만둣국을 끓이고 겨란물을 묻힌 햄을 구웠다. 소주는 덤이었다. 아니, 사실은 소주를 마시고파서 만둣국과 햄을 준비한 것인가. 만둣국은 제법 고깃국의 맛이 났다. 차가운 소주 반잔을 입에 털어넣고 뜨끈한 만두 반알과 겨란을 푼 만둣국 한술을 급히 먹는다. 크으 하는 잇소리를 내며 잘 구워진 햄 한 조각을 초고추장에 슬쩍 찍어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퇴마록 국내편을 몇 줄 읽는다. 청소년기에 감수성과 인간의지를 일깨워준 작품이다. 아직 현승희를 만나기 전 박신부와 현암 그리고 준후가 이제 막 모여서 퇴마행을 전개하는 지점이다. 퇴마록을 보며 울고 웃던 젊었던 시절이 떠올라 가슴 아랫께부터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때 쯤 남아 있는 만둣국을 탈탈 털어 두 병째를 꺼내고, 흡혈마 에피소드는 마무리에 접어든다. 몇 번을 보았던 내용이지만 꽤 긴 시간을 격하여 다시 읽으니 결말이 새롭기 그지 없다. 어서 초치검의 비밀까지 읽어가야지. 만둣국 한 그릇과 신나는 소설에 올빼미 둥지 같은 내 집이 행복의 훈기로 채워진다.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