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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1_읽기

밤의 거미원숭이

 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림 안자미 미즈마루 옮김 김춘미

 

 단편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른바 초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물론 단편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하다는 표현은 작가의 표현을 어느 정도 인용한 것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소설을 쓰려고 마음 먹는다면 제법 머리를 쥐어 뜯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하고 개성있는 구조와 표현 들이 사용된 소설이다. 작가가 장편소설을 한창 집필하는 중에-태엽감는 새- 한달에 한 편 씩 마치 긴장을 이완시키기 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며, 양복 광고를 위해서 쓴 작품이어서 매달 잡지에 양복 광고와 함께 실린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양복과 소설은 아무런 연관 고리가 없다는 것도 독특하다.

 

 정해진 플롯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주로 기억에 남는 구조는 나, 라는 주인공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동안-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중이라던지, 혹은 원고를 작성 중인 중이던지- 집에 누군가가 찾아 온다. 그 누군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의인화된 물건이나 동물일 수도 있다. 여튼 초대받지 않은 이른 바 불청객의 입장인 그 누군가는 뜬금없는 대화를 이끌어내고, 여기서 또 재밌는 것이, 주인공이자 집주인인 나는 어느 정도 상대의 뜬금없는 등장과 실없는 대화에 당황하면서도 겉으론 짐짓 태연한 척 대화에 임하는데, 이 장면이 피식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곤 둘이서 기묘한 대화에 빠져들게 되고, 그 결론은 항상 기이하게 마무리가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반전도 있을 테고 혹은 응어리 같은 것도 남을 테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작가의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그 표현, 수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좀 전에 완독한 터라, 가장 최신에 읽은 단편 중 두 편을 남겨놓고자 한다. [새빨간 고추] 와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라는 작품인데, 첫 번째 것은 재밌는 꽁트 한 편을 본 기분이고, 한 편은 조금은 아릿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이다.

 

 

[새빨간 고추]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는 툇마루에 나갔더니,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서 새빨간 고추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방석이 하나, 버려진 것처럼 외롭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

 고추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마치 '하'라는 글자를 한 줄로 나란히 늘어놓고, 하나하나 차례로 읽어 내려가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나는 그 부근을 대충 살펴보았지만, 역시 어머니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나는 큰 소리로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고추는 그동안에도 계속 같은 투로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나는 툇마루에 서서, 웃고 있는 새빨간 고추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새빨간 고추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고 계속 웃을 뿐이었다.

 "이봐, 너는 어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지? 어머니는 툇마루에서 내가 어깨를 주무르러 올 것을 기다리셨고, 다리가 불편하니까 그렇게 멀리는 못 가셨을 거야. 너는 거기에 쭉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보았을 것 아냐? 바보처럼 웃지만 말고 빨리 가르쳐줘. 나도 바쁘다고."

 "하하하하."

 고추는 좀더 큰 목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설마 네가 어머니를 잡아먹은 건 아니겠지?"

 나는 걱정이 돼서 물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내 말을 듣자 고추는 한층 더 심하게 웃어댔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나는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고추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왠지 나도 점점 우스워졌다. 나도 모르게 볼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진짜로 어머니를 먹어버린 거야?"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물어보았지만, 곧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고 나도 '하'라는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웃었다. 내가 웃자, 고추는 좀더 심하게 웃었다. 고추는 글자 그대로 포복절도하며 웃고 그 부근을 데굴데굴 굴렀다. 고추는 휴-휴-숨을 몰아쉬었고, 이마에는 땀까지 맺혔다. 그런데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고추는 너무 웃어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실룩실룩거리며 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를 비틀자, 입에서 어머니가 툭 튀어나왔다.

 "저런 저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옛날부터 간지럼 태우기를 무척 잘 하셨다.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소녀가 소년한테 묻는다.

 "너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 중의 기적 소리만큼"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 시나 세 시, 그 쯤일 거야. 하지만 몇 시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한번 상상을 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도 전혀 안 들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장소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설령 내가 이대로 사라진대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힌 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압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그대로 쩍 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 같은-그런 그낌이야. 이해할 수 있어?"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거야. 이건 비유가 아니야. 사실이라고. 이것이 한밤중에 홀로 잠이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이것도 알 수 있겠어?"

 소녀는 잠자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아주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로가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만큼 멀리서 들려오거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 기적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기적 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면 내 심장의 통증은 멈추고 시곗바늘도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 위로 천천히 떠올라. 모두가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 정도로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거기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이번에는 소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