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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4_유희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투어

 

 가족이나 친구가 수원을 방문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좋은 장소로 데려가 좋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했다. 예전에 가족들이 올라왔을 땐 광교 호수 공원으로 산책을 하러 갔었지만 날이 너무 덥고 햇볕이 강해서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에 또 누군가가 수원을 방문한다면 어디로 데려가주는 것이 좋을까? 역시 수원이란 고장의 내세울만한 아름다움은 수원화성과 그 성곽길이라 생각이 된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산책코스를 파악하여 이후 누가 오더라도 아 이곳만큼은 잘 안내할 수 있을 요량으로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란 것을 해보기로 했다.

 보통 수원화성을 간다치면 그 중심으로 생각되는 화성행궁-옆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있다-을 가거나 혹은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등의 문 쪽을 가게되는데, 이번 성곽길투어는 고민할 것도 없이 화성행궁을 시작점으로 하면 되었다. 화성행궁 관광안내센터에서 화성행궁 입장권을 사면서 성곽길 스탬프북을 요구하면 작은 책자를 내어주는데, 성곽길 스탬프투어의 코스는 아래와 같다.

화성행궁 - 수원화성박물관 - 창룡문 - 화홍문 - 장안문 - 수원전통문화관 - 화서문 - 서장대 - 팔달문 - 남수문 - 생태교통마을 커뮤니티센터

 꼭 화성행궁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각 지점에서 스탬프를 받기만 하면 되는데, 우선은 화성행궁을 찬찬히 둘러본 후에 시작하기 위해 저 코스를 그대로 밟기로 했다. 저 코스대로라면 수원화성의 중심인 화성행궁을 기점으로 3시 방향으로 나아간 다음, 시계 반대 방향으로 크게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시작점인 화성행궁 근처의 생태교통마을 커뮤니티센터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면 된다.

 화성행궁 앞 광장과 시립미술관은 전시회를 보러 몇 번 와보긴 했지만, 입장권을 사서 화성행궁에 들어가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선 광장을 지나려니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광장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었고 어렸을 적 이후로 거의 본 적이 없게된 연날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되었다. 옛날같은 한지 베이스의 소박한 방패연 같은 것이 아니라, 독수리나 그 외의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만들어진 멋진 연들이 푸른 하늘을 부르르 떨어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목을 빼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내 행궁으로 들어갔다. 행궁 내에는 우선 오래된 큰 느티나무가 있었고 주위에 끈을 길게 달아서 소원쪽지를 치렁치렁 매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나도 올해의 작은 소원을 쪽지에 적어서 한켠에 걸어두었다. 이루어진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소원쪽지에 저마다의 내용을 적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금쯤은 흐뭇해진 마음으로 행궁의 여기저기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없었고 대부분 옛 가옥에 옛 복식을 입은 실물싸이즈의 인형들을 세워두고 옛 문화를 재현해놓았는데 임금이 머무는 행궁인지라 일반 서민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아무래도 야간에 개장을 하는듯한데 날이 저물길 기다리긴 힘들듯하여 행궁 관람을 마치고 잽싸게 행궁 후원 쪽의 높은 곳에 위치한 미로한정까지 올라 마지막으로 수원시내를 내려다봐준 후 행궁을 빠져나왔다.

 행궁 안의 느티나무 옆에 첫 번째 스탬프 지점이 있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첫 번째 스탬프를 꾹 눌러찍은 후, 본격적으로 성곽쪽으로-행궁에서 나와 쭉 직진-걸음을 옮겼다. 성곽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인 두 번째 지점 수원화성박물관에 도착했을 무렵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가를 잘 보내고있는지 안부를 물으셨고 마침 운동도 할겸 화성으로 놀러나왔다고 말씀드렸다. 언젠가 엄마를 데리고 꼭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이런 좋은 곳 많이 다녀보셨을까. 나이들면서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다닐 때면 언제나 가족 생각이 난다.

 본격적인 성곽투어는 창룡문 성곽길에서 시작이 된다. 이 구간은 예전에 한 번 동료와 함께 와본적이 있었는데 그 땐 야간이었고 밤하늘에 높게 뜬 달빛에 의지하여 걷다가 창룡문 바깥의 플라잉수원을 타기위해-결국 타진 못했지만-창룡문 바깥으로 빠져나간 적이 있었다. 이번엔 성곽길 내쪽 길로 계속 걸었다. 걷다보니 성곽안쪽 구릉의 푸른 풀밭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고 햇살을 쬐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광경이 보였는데 그렇게 여유롭고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곳이 아무래도 요즘 핫플레이스려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 어딘가에서 누가 사람보다 큰 대형 연-푸드득 용틀임하는 소리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컸던-을 날리고 있었고 아마도 내 머리 위 몇십미터 즈음에서 푸닥거리를 하고 있었다. 넋을 놓고 한참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다시 성곽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창한 여름날 오후의 진귀한 경험이었다.

 걷다보니 평지 어귀에 거대한 옛 건물터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사방이 트여있었고, 돌바닥에 사람들이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어주며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군사들을 지휘하던 동장대라는 이름의 지휘소라고 한다. 차가운 돌바닥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가늠해보는데, 총 11 개의 지점으로 구성된 성곽길 투어의 3번째 창룡문과 4번째 화홍문의 중간쯤 되겠다. 이 시점에 이미 꽤나 발바닥이 부어올랐는데 일단 참고 나아가보기로 했다. 걷다보니 이번엔 아름다운 연못과 아름다운 누각이 나왔다. 그 유명한 용연과 방화수류정이었는데, 방화수류정엘 올라보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정자에 자리하여 그 아래에 펼쳐진 아름다운 용연을 한가로이 관람하고 있었다. 용연의 중앙엔 작은 섬도 조성되어 있었고 아마도 연꽃잎으로 추정되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연 주변에 피크닉 셋트를 대여해주는 곳도 있다고하니 다음에 사용해보면 좋을듯 하다. 내려와서 화홍문을 지나며 거센 물줄기가 흘러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계속 성곽길 투어를 진행했다. 군데군데 공사중이어서 성곽길을 막아놓은 구간이 있어서 그런 구간은 평지로 내려와 걸었다. 일부 스탬프 지점은 성곽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는 곳들도 있어서 숨바꼭질하는 기분도 들곤 했다. 공방거리를 지나친 기분도 들었는데 워낙에 헐떡이며 걷고있었던 지라 평지에선 느긋하질 못하여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여덟 번째 지점인 서장대는 등산하는 기분마저 들었는데, 여기서 한 번 고비가 찾아왔다. 비말 마스크를 썼음에도 숨이 가빠서 종종 우뚝 선채 숨을 골라야 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찰라, 마침 내 앞 수십미터 쯤에서 먼저 올라가고 있던 어린 여성이 있었는데-이젠 뒷모습만으로도 대충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별로 힘든 내색도 없이 서장대가는 길을 쭉쭉 걸어갔다. 그 모습에 자극받아서 억지로 그 뒤를 따랐는데 생각해보면 그 이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고마워요, 이름모를 분. 한참을 걸었을까. 드디어 숨 이  멎   는    구     나 생각이 들 때 쯤 드디어 서장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이 핑 돌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기억의 왜곡이겠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혼자서 성곽길을 돌며 가장 힘들다는-하지만 누구나 평범하게 성공하는-서장대까지 오르고나니 잠깐 동안 알 수 없는 공허가 찾아왔다. 아무래도 마음의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생각이 잠시 멈춘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잠깐 엉덩이를 붙이고 호흡을 고르며 시내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만큼 쉰 후 아홉 번째 열 번째 그리고 마지막 열한 번째 지점을 향해 후덜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지점은 화성행궁과 수원시립미술관의 근처에 있었기에, 성곽투어의 거대한 시계 반대 방향 행군을 멈추고 그 중앙으로 나아갔다. 지점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세련되고 도시적인 라운지음악이 어딘가 가게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은 골목 갤러리 쯤 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그 때, 마지막 지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탬프를 찍는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등판은 이미 소금 땀으로 젖어 있었고 족저근막염은 아까부터 아프다며 불평 중이었다. 마음 속으로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스탬프투어 기념품을 나눠주는 기념품점으로 이동했다. 기념품점은 당일 휴무였다. 11개 스탬프를 모두 찍었지만 최고 상품인 비누말고, 8개 스탬프의 상품인 마그넷을 받을려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나는 말그대로 OTL 을 했다. 3시간에 걸친 투어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귀가 후 쏘야를 만들어서 향기로운 맥주와 함께 심신을 달래곤 휴가를 마무리하며 잠이 들었다. 아마도 그 날 꿈 속에서 나는 낮의 여정을 이어서 계속 걷고 있었던 것 같다. 발의 통증은 그 후 일주일을 더 갔으리라.


무한, 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