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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없음 보이는 풍경의 삼분의 이가 하늘인 그 강변에서(나는 웃었던 것 같다). 대여섯 번 걸어야 한 번 받음직한 그의 전화번호가 아니더라도 그의 명함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정말로 바쁜 사람이지만, 물론 그걸 알고 있는 나로써는 어찌된 심사인지 그를 꼭 이 곳으로 불러내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억지, 부당한 요구. 평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마음씨까지 좋은 그는 억지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우리는 이른 아침 이슬에 젖은 강변을 따라 말을 달려왔다. 불러낸건 나인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근황을 얘기하고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수줍음을 느끼며 아직 덜자란 말의 갈기만 자꾸 손으로 빗어내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그의 보이스를 들으며 나도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강변 위로 펼쳐진 광활한 하..
저물어가는 올해에의 소회 베란다 바깥에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파랗다가도 금새 잿빛으로 무거워진다. 겨울인듯 하다. 어렸을 적부터 내 자신의 기준으로 겨울은 언제나 12/1/2 월이었으나, 나이가 먹고서부터 내 몸이 춥다고 느껴야만 비로소 아, 겨울이구나 생각한다. 겨울은 이미 마중나와있었고 다만 내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나는 늘 그런 태도를 견지해오고 있다. 눈 앞에 펼쳐진 사실이 내게 유리하지 않으면 자꾸 딴 곳을 바라보며 이를 못본 척하려 군다. 겁을 집어먹은 어린 아이가 내 속에 늘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나에게 한없이 관대한 편이라, 언제까지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그렇게 못본 척 못들은 척 모르는 척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 큰 사건이 벌어지거나 깨달음을 얻지 않는 이상은, ..
시그넷에서의 밤, 뒷뜰 잠자리에 들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가 문득, 가슴 한 켠에서 소소하게 올라오는 헛헛함에 박하향 담배를 챙겨들고 뒷뜰로 나갔다. 치익,하며 타오르는 불꽃에 담배를 사르고는 입에 물기 전에 잠깐 누군가의 이름을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담배를 물었다. 한 모금 빨고, 후욱하며 하늘을 향해 한숨같은 연기를 내뱉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의 모든 것들이 강하게 옛것을 그리워했다가, 왠지 모를 이질감에 몸서리치며 지금으로 돌아오고, 이어 앞과 뒤, 양 옆 그리고 모든 공간에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나를 탓하고 있는 듯했다. 숨을 곳 없는 뜰의 한 가운데서 나는 나를 꾸짖고 성토하는 아우성들에 둘러싸인 채 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그렇게. 사납게 빛나고 있는 별빛들과 마음내키는데로 높아도 졌다..
Tour Eiffel 에펠탑 전방으로, 아이스링크가 있었다. 하얀 빙판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빠른 속도로 스케이팅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껏 두 팔을 활개치며 달렸다. 내심 나도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유치원 이후로 스케이트를 타보질 않아서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난간에 몸을 걸친채 한동안 빙판과 에펠탑을 번갈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좁은 빙판에서 스케이팅 실력을 뽐내는 멋쟁이도 있었거니와, 싱글코트를 차려입은 남자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다정하게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스케이터들은 그런 연인을 배려하듯 하얀 얼음가루를 사방에 흩뿌리며 사선으로 스쳐 지나갔다. 괜히 내 등이 시려왔다. 외롭다면 외로운 것이겠지. 30살의 옹졸한 감정이란. 흣 이만 난..
Tour Eiffel 정시에 점멸하는 빤짝조명들. 탑의 꼭대기층에서 우린 춤을 추었지. 춤과 춤 사이를 바람이 건드리고 지나간걸 기억해. 무한, 영원.